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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 한 토막] : 어쩌다 난 무신론자로 되었나? : 이대근(성균관대학교 명예교수-서울상대 58학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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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23-09-14 17:09 조회64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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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 한 토막] : 어쩌다 난 무신론자로 되었나?

 이대근(李大根)

(성균관대학교 명예교수-서울상대 58학번)

 

 

(1)나는 19584월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에 들어갔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지만, 일단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게 되었으니 우선 어딘가에 居處를 마련해야만 했다.

청량리역에서 洪陵 쪽으로 가는 새로 난 큰 길 가에 청량리경찰서가 들어서고, 그 뒤쪽에 허름한 韓屋 하숙집의 조그만 부엌방을 거처로 잡게 되었다. 이 집은 1년 먼저 서울상대에 들어간 고등학교(대구상고) 선배*가 하숙하던 곳으로 그 집 주인에게 나를 소개시켜준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찾아갔을 때는 이미 하숙방 34개가 다 차고(방 하나에 2명씩 투숙) 여유가 없다면서 주인 아주머님은 무척 난처해했다. 그러면서 어딘가를 급히 다녀와서는 나에게 이런 조건의 방이 있는데 괜찮겠느냐고 물어왔다.

 

(* 서울상대 졸업 후 금융계로 진출하여 朝興銀行 행장까지 지낸 張喆薰 선배로서, 그는 당시 졸업을 앞두고 전액 國費 장학생으로 2년제 遞信大學으로 진학키로 이미 進路가 결정되어 있는 나로 하여금 세상 물정을 모른다면서 온갖 이유와 구실을 붙여 결국 체신대학을 포기케 하고 서울상대로 가도록 방향을 틀게 함으로써 나의 인생항로를 완전히 뒤바꾼 장본인임)

주인 아주머님 왈, 원래 부엌일 하는 사람(食母) 용으로 만든 조그만 샛방이 하나 있는데, 지금 그 방을 서울대생이 독방을 원해 혼자 쓰고 있다면서, 그에게 내 딱한 사정 이야기를 하고 비좁아 무척 불편하겠지만 어떻게 한 학기만 같이 쓸 수 없겠느냐고 하였더니, 1주일에 두 번 정도 저녁시간에 자기에게 공부하러 오는 학생이 있는데, 그 때는 자리를 좀 비켜주어야 한다는 얘기였다고 한다. 그런 조건이라면 아무 문제없다면서 당장 주인 아주머님과 같이 찾아가 그에게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어렵사리 그 학생과 합숙하는 것으로 낙착됐다.

수인사를 하고 서로 자기소개를 하는데, 그는 全北 全州高 출신으로 작년에 文理大 數學科에 들어간 金宗殖이라고 했다. 2외국어로 불문과 과목을 듣고 있는데, 같은 반의 한 여학생에게 개인적으로 불어 공부를 좀 시켜줘야 해서, 죄송하지만 그 시간에는 자리를 좀 비어주어야겠다고 양해를 구하였다.

이 말을 듣자 나는 얼른 납득이 가지 않는 바가 있었다. 수학과 학생이 불문과 학생에게 불어를 가르친다? 그것도 여학생을 자기 하숙방에까지 불러 개인교습을 한다는 것이 좀 이상하게 여겨졌으나, 그 보다도 제2외국어로 불어 공부를 한다는 그의 말 속에는 영어, 독어 정도는 이미 마스터하고 이제 불어까지 공부한다는 그런 語感이 느껴졌다. 정말 놀랄 일이었다.

! 그러세요? 불어를 무척 잘 하시는가 봐요. 그럼 아예 불문과로 가시질 않고 왜 數學科로 가시게 되었어요?’ 하면서 수학과로 가게 된 동기가 궁금해서 물었다.

그의 대답은 이러했다. 처음부터 자기는 理科를 지망했는데, 이과 중에서도 평소 數學을 좋아하는데다가 또 수학이 모든 학문의 기초가 아닌가 하여 수학과로 가기로 했다는 것, 실은 대학입시를 앞두고 전공을 수학과와 물리학과를 놓고 무척 고민했다면서, 결국 수학과를 택하게 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면서, 물리학이 예컨대 수학이 개척해놓은 영역까지 연구가 따라와 주었더라면 우리 인간의 삶이 지금보다 훨씬 더 윤택해졌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물리학보다는 그래도 수학이 낫겠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이밖에도 그가 수학과를 지망하게 된 데에는 또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었던 것 같았다. 얘기인즉, 자기 바로 위의 형이 이미 같은 문리과대학 물리학과(4학년)에 적을 두고 있었던 것도 수학과를 택하는데 다소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닌가 해서였다.

 


(2)
도중에 그는 이런 에피소드 한 토막을 소개했다. 서울대 입학시험 치러 올라온 날 형님 하숙방에서 같이 자고 다음날 시험 치러갈 예정이었는데, 공교롭게도 그날 저녁에 형님 친구 몇 분이 찾아와 밤늦게까지 술 파티를 벌리는 바람에 그만 영 잠을 잘 수가 없었다는 것, 그리하여 상경할 때 속으로 다짐한 수석 합격의 꿈은 그만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는 사연이었다. 중간 중간에 형님이 내일 종식이 시험 치는데 그만 돌아가 달라고 사정을 했는데도, 그 친구들은 무슨 종식이 합격 걱정(?)이냐고 되래 형님을 나무라면서 막무가내로 계속 시간을 끌었다는 것이다. 비록 수석 입학은 놓쳤지만 그래도 그 해 서울상대 수석으로 들어간 박영0(전주고 출신)보다는 성적이 좋았다는 얘기도 덧붙였다.

듣고만 있자니 좀 쑥스럽기도 하여 그럼 수학을 깊이 공부하려면 어디 선진국에 유학이라도 해야겠네요?’ 라고 했더니,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여기서 學部를 마치면 곧바로 미국으로 건너갈 계획이라면서, 미국지도를 한눈에 꿰고서 미국 명문 대학, 그 중에서도 특히 수학으로 유명한 대학 이름을 꿰면서, 그들 대학이 미국 51어디어디에 속해있는가를 하나하나 설명해주었다. 51개 주(이름)는 말할 것도 없고 미국이라는 나라가 지구 어디쯤에 붙어있는지조차 잘 모르는 나에게는 너무나 신기한 얘기였다.


(3)
이런 두 사람간의 룸메이트 관계는 자연스럽게 마치 스승과 학생 간의 師弟之間처럼 발전했다. 한방을 사용하면서 나는 무슨 문제에 부딪치거나 의문사항이라도 생기면 서슴없이 그에게 묻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용기를 내어 평소 마음속에 품고 있던 의 존재여부에 대해 물었다. ‘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라는 나의 엉뚱한 물음에, 그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 은 존재하지 않는다!’ 라는 명쾌한 즉답이었다. 자신은 無神論者라면서 그 이유를 대충 이렇게 설명한 것으로 기억된다.

만약 신이 있다고 가정하면 이 세상이 어떻게 되겠어요? 지금 같은 이런 찬란한 인류 문명을 이룩할 수 있었겠어요? 그 많은 과학자/연구자들의 위대한 발명/발견들이 가능했겠어요? 그들의 연구가 자칫 신의 영역을 침범하여 무슨 刑罰이라도 받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연구를 하지 못했을 것이오. 처음부터 신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위대한 발명/발견이 가능했다는 假說이 성립한다는 것, 다시 말해 오늘의 이런 위대한 인류문명의 업적 그 자체가 신의 존재를 부정할 수밖에 없게 하는 확고한 증거라는 얘기였다.

그럼 위대한 과학자/연구자들은 모두 무신론자로 되고 또 宗敎 같은 것도 가지지 않겠네요? 라는 나의 물음에, 그것은 반드시 그렇게 볼 수만은 없을 것이라면서, 연구를 하다 보면 도저히 풀리지 않는 어떤 不可思議에 부딪치게 되고 그럴 때는 어쩔 수 없이 연약한 인간이기에 을 찾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宗敎 또한 반드시 有神論을 전제로 하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고 했다.

 


(4)
다른 한편 그는 당시(1950년대 말) 한국 대학가에 전파되기 시작한 實存主義철학에 대해서도 나에게 열심히 강의를 해주었다. 數學하는 사람은 모름지기 哲學도 공부해야 한다면서 자신의 철학 실력을 과시했다고나 할까? 실존철학에는 유신론적 입장과 무신론적 입장의 두 가지가 있는데, 자기는 하이데거, 니체 등의 무신론적 입장을 선호한다고 했다. 특히 니체의 신은 죽었다는 이론에 대해서도 많은 설명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아무튼 나의 대학생활에 있어 더없이 중요했던 경험은 이처럼 대학생활의 시작을 요행히도 天才라고 할 만한 뛰어난 수학과 선배를 만나게 되고, 그로부터 의 존재를 비롯한 宇宙의 본질 등에 대한 귀중한 철학 강의를 받은 셈이다. 그 중에서도 나에게 았어 가장 중요한 테제는 그를 통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의 존재를 부정하는 섣부른(?) ‘無神論으로 기울게 되었다고 하는 사실 일게다. 그로 인해 대학시절 가까운 동료의 권유로 당시 유명하다는 어느 교회(경동교회 姜元龍 목사)說敎를 들으려가기도 했지만, 재미가 없어 한, 두 번 가다가 그만 둬 버린 일도 바로 이 수학과 친구의 강의(과외수업) 영향 때문이 아니었던가 싶다.

 

 

(5)대학 1학년 첫 학기는 이처럼 정규의 학교수업보다도 하숙방 룸메이트로부터 받은 철학 강의에 더 열중했는지도 모른다. 하기야 대학 1학년 수업이란 철학, 문학, 역사, 심리학 등 교양과목으로 되어 있어 두 가지 강의가 상호 보완적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런 가운데 어느덧 대학 1학년 1학기는 뜬 구름같이 지나고 여름방학으로 들어갔다.

어느 날 그는 나에게 고향 내려가는 걸음에 全州 자기네 本家를 한번 다녀갔으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몇 달 간이지만 그동안 둘 사이에 상당히 깊은 정이 든 徵表였으리라. 나로서야 고맙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흔쾌히 고맙다고 하면서도 속으로는 나 같은 촌뜨기가 그런 도시 양반가에 함부로 가도 되는가 싶기도 했다. 실례가 될까봐 행동이 무척 조심스러웠다.

도착하자마자 그의 부모님께 시골 식으로 큰 절을 올렸다. 엄친께서는 들은 바대로 전주 시내 모 중등학교 교장 선생님이라 하셨다. 그리고 집의 구조가 무척 특이했다. 해방 전에 일본인이 살던 집을 인수한 것이라고 했다. 미닫이문, 다다미방으로 이루어진 물론 나로서는 난생 처음 보는 구조였다.*


(*
이 집은 해방 전 일본인이 살던 가옥으로 8.15해방 직후 美軍政에 의해 몰수된 歸屬財産(vested property)”의 일환으로, 2015년 본인의 마지막 저서인 歸屬財産 硏究의 연구대상이기도 하며, 당시 美軍政은 도시지역 주택난 해소를 위해 귀속주택을 빨리 민간에게 拂下코자 하였는데, 아마 박사 부친께서 그 집을 불하받은 것이 아닌가 생각되며, 본인의 拙著는 한국에서는 인기가 별로 없었지만, 일본에서 번역 출간되고 일본 國基硏이란 연구소에서는 그 책을 대상으로 외국인에게 주는 일본연구특별상까지 수여하는 영광을 베풀어주었음)


이런 거창한 집에서 자라고 또 교장 선생 아버지 밑에서 많은 것을 듣고 배우고 하였으니 일찍부터 그렇게 많은 것을 알게 되고
博識하게 되었구나 싶었다. 全州에서의 日課는 잘 생각나지 않지만 어쨌든 나로서는 난생 처음으로 일본식 다다미방에서 하루 밤을 지내고 다음날 그의 歡送을 받으며 全州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전주역에서의 어설픈 헤어짐이 그와의 생의 마지막 만남으로 기록될 줄이야! 바보같이 그의 주소나 연락처 같은 것 하나 남겨 놓지 않고 같이 하숙집을 나와 헤어지고 말았으니 이 무슨 變故란 말인가? 경험부족 탓이기도 하지만, 이런 허무하기 그지없는 헤어짐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6)그 후 金宗殖이란 이름은 나의 뇌리에서 까맣게 잊고 살아왔다. 왜 그랬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몇 달간의 짧은 기간이지만 그와의 情誼義理를 생각한다면 나로서는 결코 그렇게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아니 있어서도 안 될 용납될 수 없는 일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무정한 세월은 잘도 흘러 내가 전주역에서 그와 어이없이 헤어진 지(19587) 30년도 더 지난 1987-88년경 서울의 한 대중식당에서 그를 邂逅(해후랄까 遭遇(조우)한 일이 있었다. 즉 먼빛으로 서로 눈을 마주친 일이 있었다. 지하철(2호선) 낙성대역에서 서울대 후문으로 들어가는 큰 길 가의 한 대중식당에서 우연히 있었던 일이다. 당시 그 식당 건물 2층에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와 대학원생들이 한국경제사연구를 위한 낙성대연구실이란 연구서클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나도 그 멤버의 일원으로 그 날 무슨 세미나를 마치고 그 식당에 식사하러 간 참이었다. 우리도 여러 명의 단체 손님이었는데, 좀 떨어진 건너편 좌석에 또 한 패의 손님들, 대학생 같은 젊은이 몇 명과 늙수레한 교수 같은 분이 식사하는 팀이 있었는데, 얼른 보기에 그 교수 같은 분이 옛날 내가 청량리 하숙집에서 만난 그 문제의 사나이 金宗殖 학생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식사 끝나면 한번 확인해봐야지! 하고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그가 먼저 식사를 마치고 나가면서 아는 척 목례를 한 것 같았는데 그만 순간적으로 누구 아니냐고 인사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애석하기 그지없는 순간이었다.

무척 후회스런 마음으로 집에 돌아오면서 회상해보니, 그가 옛날에 대학 졸업하면 바로 미국 유학 간다고 얘기했으니, 아마 유학하고(박사하고) 돌아와 지금 서울대학(수학과) 교수로 있으면서, 오늘 같이 식사한 그 젊은이들은 아마 서울대 대학원생들이 아닐까? 우리와 같이 세미나 끝나고 거기 식사하러 온 것은 아닐까? 온갖 생각이 뇌리를 마구 흔들었다.


(7)
서울대 수학과에 연락하여 그런 교수가 재적하고 있는지를 확인해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평소 알고 지내는 본교(성균관대) 수학과 모 교수를 만난 자리에서 혹시 김종식이란 수학교수(아마도 서울대)를 혹시 모르느냐고 물었다, 대뜸 하는 소리가 경제학 하는 사람이 그런 훌륭한 사람을 어떻게 아느냐고 따지듯 되물었다. 학창시절에 좀 알고 지낸 사이라고 했더니 그는 지금 서울대 교수로 있고, 한국 노벨상 후보 제1순위로 곱히는 대단한 인물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요즘 몸이 좀 안 좋다는 소문이 있더라고 했다.

어이쿠! 싶어 서둘러 서울대 수학과로 사정을 알아봤더니 요즘 건강이 안 좋아 출근 못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어렵게 알게 된 그의 집 전화로 여러 번 전화를 걸었으나 그때마다 집안 사정으로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녹음(여성)만이 흘러나올 뿐이었다. 일찍 연락해보지 못한 자신의 게으름이 후회막급이었지만 지금 와서 어떻게 하랴!

오로지 20대 초 학창시절의 그의 이미지! 보통 키에 콧날이 좀 오뚝하고 머리카락이 유난히 검은 편이었으며, 전체적으로 연약한 듯한 호리호리한 몸매, 얘기할 때는 언제나 웃음부터 먼저 띄는 명랑한 얼굴로 카랑카랑한 말씨, 누굴 욕하거나 화내는 일을 한 번도 보지 못한 그의 자상한 생전 모습을 떠올려보는 것으로 慰安을 삼을 수밖에 무슨 수가 또 있겠는가.

 

 

<後記>그의 履歷死因, 가족관계 등에 대한 궁금증을 다소나마 풀어보고자 이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서울대 수리과학부(이전의 수학과)의 행정실과 조교실, ()대한수학회 사무실 그리고 그의 전주고 동창생 등을 통해 다각도로 探問해보았으나, 학부 졸업 후 미국 퍼듀대학(Purdue University, 인디아나주)에 유학하고, 돌아와서는 짐작컨대 몇 군데 다른 대학을 거쳐 1980년대 모교(서울대)로 옮기게 되고, 1991-92년에는 ()대한수학회 회장을 맡아 국제회의를 주최하는 등 학계 발전을 위해 활약하던 중 그만 못 쓸 질병을 얻어 걸려 199354(1939-93)의 한창 일할 나이에 아깝게도 幽明을 달리하게 되었음을 파악한 정도로 무척이나 아쉽지만 만족할 수밖에 없었음을 부기하는 바임.

 

 

(2023. 7. 30. 牧野 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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