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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옳고 그름'에 대하여] 정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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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23-11-29 19:56 조회87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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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노상(경제학과 58학번)

[정치적 '옳고 그름'에 대하여]

정현식

정현식.png

성균관대학교 명예교수(경제학)

 

 

1. 요즘 우리나라 국민들은 정치적 입장에 따라 서로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며 대립하고 있습니다. 특히 국회에서 여야간에 논쟁하는 모습을 보면서 저는 같은 현상에 대해 사람들은 왜 이렇게 서로 시각과 해석과 도덕적 판단이 다른지에 대해 생각해보았습니다. 이 글에서 필자의 정치적 도덕적 견해가 암묵적으로 들어난다면 피할 수 없는 것이지만, 필자는 가능한 한 비정치적인 입장에서 이 논쟁적인 문제에 접근하려고 노력하였음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2. 우리는 매일의 일상에서 이런 저런 반응과 판단을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예컨대, 우리의 오관은 외부 자극에 대해 딱딱하다 부드럽다. 보인다. 안 보인다, 들린다, 안 들린다. 맛이 있다. 맛이 없다. 냄새가 좋다 나쁘다 등의 반응을 끊임없이 나타냅니다. 또한 우리는 감성과 이성의 작용으로 좋다. 싫다. 선하다. 악하다. 옳다. 그르다. 맞다. 틀리다. 등등의 가치적, 도덕적, 논리적 판단을 내리기도 합니다. 촉각, 시각, 청각, 미각, 후각 등 감각기관은 외부자극에 대한 직각적인 감각 반응을 보이기도 하지만, 융합되고 통합되어 직관적인 판단을 내리는 통로가 되기도 합니다.

 

여기서 직관적인 판단이라는 것은 이성적인 사유의 결과로서 판단되는 것이 아니라, 느낌에 따라 결정된 감각적 판단을 말합니다. 예컨대 좋거나 싫다라는 느낌, 왠지 그건 아니다라는 느낌 같은 것을 말합니다. 도덕심리학자들은 옳고 그른 것, 혹은 선하고 악한 것에 대한 사람들의 도덕적 판단도 상당부분 감성적 혹은 직관적 판단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실험결과를 내놓고 있습니다. 물론 도덕적 판단이 이성에 의한 논리적 추론의 결과로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실상 어떤 사람의 도덕적 판단이 직관적인 것인지 이성적인 것인지 현실에서 구분하는 것은 결코 용이하지 않습니다.

 

3. 예컨대, 어떤 사람이 "새가 운다"라는 진술을 하였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 진술이 맞는지 틀리는지 진위를 가리기 위해, 우리는 새 소리가 발생하였는지 여부와 이 사람이 새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청각기능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객관적인 증거'가 제시되기만 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 결과 그 사람의 진술이 진(眞)이라는 판정을 했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러나 여기에도 반론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의 새소리 인식이 객관적이 아니라는 주장이 그것입니다.

 

우리의 언어는 가치 중립적이거나 객관적인 아니어서, 언어라는 표현그릇에 담기는 순간 본래의 모습이 변형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새소리는 듣는 사람에 따라 '새가 운다'고 표현되기도 하고 '새가 노래한다'고 표현될 수도 있습니다. 그 사람의 진술의 진위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새가 울 수 있는 감성을 가졌는지 아니면 새 소리를 들은 사람이 새소리를 우는 소리로 듣는 심리상태였는지 혹은 둘 다 해당되는지를 검증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즉, 우리의 현상에 대한 인식은 비록 객관적이라고 주장되는 서술의 경우에도 관찰자의 가치판단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4. 우리는 감각기관의 직관적 반응을 포괄하여, 사람들이 현상을 인식하고 판단하는 유형을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즉, 감성적 (혹은 직관적) 판단과, 논리적 판단, 그리고 도덕적 판단 이렇게 세 가지입니다.

--감성적 판단은 좋고 싫은 것(嗜好의 문제. Like or Dislike)을 구분해 줍니다.

--논리적 판단은 사실과의 일치 여부(眞僞의 문제. True or False)를 구별하는 것입니다. 논리적 판단은 논리적 추론으로 진위를 논증하는것입니다.

--도덕적 판단은 옳고 그른 것(善惡의 문제. Right or Wrong, Good or Bad)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세가지로 판단의 종류를 구분하였다고 해서 이 세 가지 판단이 서로 독립적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이 세 가지 판단은 개념상 구분해본 것 일뿐 하나가 다른 것에 영향을 주거나 상호 의존적이기 때문에 하나만 독립적으로 논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이 세가지 판단은 엉켜 있으며 우리의 용어도 이런 사정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우리는 맞는다고 해야 할 경우에 옳다고 하기도 하고 혹은 좋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또 틀린 것을 나쁘다거나 싫다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판단의 종류를 주관적이거나 객관적이라는 두 가지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감성적 판단은 개인에 따라 다르게 표현될 수 있으므로 주관적이며,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도덕적 판단도 개인의 가치 기준에 따른 것이므로 주관적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논리적 판단은 객관적 사실에 입각하여 논증되는 것이므로 객관적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도덕적 판단은 사후적으로 이성에 의해 합리화되어 객관적 판단으로 포장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일상적인 판단에서 세 가지, 혹은 두 가지로 구분된 판단들은 상호 의존적이어서 독립적으로 다뤄질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면의 한계로 우리는 아래에서 옳고 그름(善惡)에 대한 도덕적 판단에 논의를 국한하고자 합니다.

 

5. 최근 우리사회에서는 이념적으로 서로 반대편에 선 사람들이 감정적으로 대립하여, 상대편을 악인으로 자기편을 선인으로 편가르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여기서는 다른 사람을 해치거나 남의 소유물을 빼앗는 등 도덕적으로 비난 받을 만한 행위를 하는 사람들은 논의의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동일 한 위치에 있다고 전제하고 이야기를 진행하고자 합니다. 상대편이 악인이라고 전제하고 이야기를 하면, 우리의 논의는 상대를 비난하고 자기를 정당화하는 선전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 입니다.

 

사람들은 논리적으로 검증하지 않고도 감정적, 직관적으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판단 하는 도덕적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런 도덕적 감정이 어떻게 얻게 된 것인지 대해서는 크게 세가지 이론이 있습니다.

첫째는 타고나는 것(nature. Nativist),

둘째는 살면서 가꾸어지는 것(nurture. Empiricist),

셋째는 이성적 사유로 얻어지는 것(reasoning. Rationalist)

이라는 3가지 주장 입니다.

 

6. 첫 번째 이론은 기독교적인 창조론에서 살펴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이 인간을 자유의지와 도덕 감정을 갖도록 창조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이런 설명에 만족하지 못합니다. Charles Darwin과 같은 생물학자는 인간도 다른 생물과 마찬가지로 환경에서 적응하여 생존하기 위해 경쟁하는 가운데 적자생존에 유리한 특질을 보유하게 되었는데, 도덕 감정도 그러한 특질로서 사람들이 유전적으로 갖고 태어난다고 주장합니다. 예컨대 같은 동족을 보살피지 않고 해치는 종은 살아남지 못하며, 특히 가족을 보살피고 보호하는 유전적 특질을 가진 종이 살아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가족을 보살피고 보호하는 특질이 "도덕적 감정"의 한 가지 근원이 되었다는 해석입니다.

 

두 번째로 도덕적 감정은 인간이 살아가는 과정에서 가꾸어지는 것이라는 이론으로 David Hume의 경험론으로 뒷받침됩니다.

세 번째 이론은 사람들의 도덕적 감정이 이성적 판단의 결과라는 주장으로 그 논리적 근거는 Socrates, Plato, Kant의 철학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7. 최근 도덕 심리학자들은 도덕적 감정이 타고 나는 것이거나 가꾸어지는 것으로 직관적인 감정이며, 이성적 사유는 직관적인 판단 이후에 사후적 합리화의 수단으로 사용된다는 실험결과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혐오스럽거나 불경스러운 것에 대한 도덕적 감정은 논리적이라기 보다는 직관적인 경우라는 것입니다. 도덕적 기준은 또한 사람들이 성장하는 과정을 통해서 스스로 체득되고 형성되거나, 문화적 교감이나 사회적 압력에 의해서 형성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즉, 도덕적 감정은 논리적인 사유에 의해서 형성되기보다는 직관적인 판단에 의해서 결정되는 경우가 더 일반적이며, 직관적인 도덕적 판단이 사후 논리적으로 합리화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즉, 감성과 직관이 도덕적 판단의 일반적인 통로이며 이성은 흔히 사후적으로 이를 합리화하는데 활용된다는 것입니다.

 

8. 현상에 대한 인식이 감정 혹은 감성과 별개로 이루어질 수 없으며, 감성 그 자체가 일종의의 정보처리 과정이란 점을 앞에서 새소리를 예로서 설명한 바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도덕적 판단도 하나의 인식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인식이 직관적 판단에 의해 이루어지고 이후에 사후적 합리화가 이루어지면, 이 사후적 합리화에 근거하여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이성적으로 설득하려 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대부분의 인식과정이 직관적 판단에 의해 이루어진다면, 우리가 정말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싶으면 그 사람을 논리적으로 설득하려 하기 보다는 그 사람의 감성을 통로로 사용하여 직관에 호소하는 것이 더 올바른 접근 방법이 될 것입니다.

 

사실 정상적인 사람의 두뇌는 직관적인 판단에 익숙하도록 구성되어 있으며 특히 사회적 정치적 판단의 경우가 그러합니다. 감정이 없고 이성만 있는 경우는 정신병적인 상태입니다. 반대로 감각과 감성만 존재할 뿐 이성적 사유가 발달되지 않은 상태는 어린 아기와 같은 정신상태입니다.

 

정상적인 성인의 경우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감성과 이성이 적절히 조화된 상태입니다. 요약 하면, 도덕적 판단의 직접적인 통로는 감성과 직관이고 이성적 사유는 그 다음에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상대방을 이성적으로 설득하려고 할 때, 그 성패는 이성적 사유가 상대방에게 새로운 직관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고 할 것입니다.

 

9. 이렇게 보면, 도덕적 판단에서 이성적 사유의 역할은 법칙이나 진리를 밝히는데 있지 않습니다. 도덕적 판단에서 이성과 논리의 역할은 정치인들의 경우, 자신의 명성을 지키고 논쟁에서 우위를 유지하기 위해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한 경우가 많습니다. 이 과정에서 정치인들은 감성적 혹은 직관적 판단을 사후적으로 합리화 하는데 너무 능숙하여 때로는 스스로가 옳다고 진정으로 느끼고 확신하기까지 합니다.

 

요즘 Google이나 Naver 등의 검색기능을 잘 활용하면 우리는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거의 다 찾아낼 수 있습니다. 서로 반대되는 논리를 전개하기 위해 필요한 정보를 같은 검색기능을 통해 얼마든지 동원할 수 있고, 그 정보들에 의해 정반대의 주장을 각각 합리화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어떤 상반되는 직관적인 판단도 그럴듯한 논리와 이를 뒷받침하는 정보자료로 서로 정당화하고, 각기 스스로가 옳다고 확신하게 되면 이성적인 논쟁으로 상대방을 설득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지고 맙니다.

 

10. 앞에서는 주로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도덕적 판단이 어떻게 직관적으로 이루어지며 사후적으로 합리화되는 경향이 있는지 설명하였습니다. 개인으로서 인간의 직관적 판단에서 동기가 되는 것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본능적 욕구일 것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사람도 다른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이기적인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났으며, 이 이기적인 유전자는 인간의 여러 가지 정신적 생태를 만들어 내는 기반이 됩니다. 그러나 개인에서와 마찬가지로 집단적인 협동을 통해 진화해온 생명체들의 집단에 대해서도 Darwin의 적자생존이론을 적용할 수 있습니다. 무리(집단)도 개인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집단간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집단의 구성원들이 집단의 지도자의 권위에 승복하거나 집단의 이익에 충성하는 특질을 갖는 것이 필요합니다. 충성심을 가진 구성원으로 이루어진집단은 그렇지 못 한 집단을 이겨 집단(혹은 부족)간의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아 더 많은 자손을 퍼뜨리며 번성하게 될 것입니다.

 

Darwin의 이론을 적용하면 개인적 이기심을 초월하는, 집단 이기주의라는 집단적 도덕성은 집단 차원의 자연도태 과정에서 발전됩니다. 즉, 무리 전체의 이익에 기여하는 집단적 도덕심을 갖춘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부족(혹은 집단)이 그렇지 않은 부족을 대체하는 가운데 집단도덕성도 진화되었을 것입니다. 인간이 개인 차원에서는 이기적이면서도 집단적인 차원에서는 이타적인, 모순적 도덕성을 발전시켜 온 것은 이 같은 집단적 자연도태에 의해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이런 논리를 연장하면, 사회적 동물로서 인간은 자신이 소속된 집단의 이익을 보호하고 지지하기 위해 내린 직관적인 판단을 지지하기 위해, 어떠한 논리를 동원해서라도 합리화하는 경향을 가질 것입니다.

 

11. 그러면 집단적 도덕감정은 어떤 기준에 의해 합리화되는 경향을 갖는지 살펴봅시다. 우선 집단적 도덕감정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할 때 어떤 기준이 원용될 수 있을까요. 비유를 들자면, 우리는 미각적 감각기능으로 맛이 있고 없음을 판단합니다. 우리는 달고 쓰고 맵고 짜고 시고 떫음이라는 미각적 기능에 의해 어떤 음식이 맛있다 맛이 없다고 평가합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달고 쓴 것만 가지고서 맛이 있다 맛이 없다라는 평가를 합니다. 흔히 어린애들의 미각은 단맛과 쓴맛에 의해 결정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맛에 대한 취향이 이보다 다양하여 단 맛과 짠 맛으로 맛을 구분합니다. 그러나 나이 들게 되면 음식 맛에 좀더 까다로워져서 6가지의 미각을 다 사용해서 총체적으로 맛있다 없다는 평가 할 것입니다.

 

도덕적 판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우리는 여러 가지 기준에 의해 자신의 도덕성을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미각기준에 여러가지가 있듯이 도덕적 판단에 어떤 기준이 가능할까요.

 

Haidt에 의하면 도덕적 판단기준으로 다섯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1) 돌보아주는가 혹은 해치는가(care/harm),

(2) 공정한가 혹은 속이는가(fairness/cheating),

(3) 충성하는가 혹은 배신하는가(loyalty/betrayal),

(4)권위에 승복하는가 혹은 반항하는가(authority/subversion),

(5)고상한가 (성스러운가) 혹은 천박한가(야비한가) (sanctity/degradation)의 다섯 가지입니다.

 

진보주의적인 도덕감정론을 잘 대변하고 있는 현대의 대표적 도덕철학자인 Rawls의 ‘정의론’에 의하면 도덕적 기준은 공평과 자유이며 위 다섯 가지 도덕기준의 처음 두 가지에 해당합니다.

 

12. 사람들은 나면서부터 위에서 언급된 도덕적 기준을 부분적으로 가지고 태어난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아마도 사람들은 어떤 도덕적 감정(직관)은 본능적인 형태로 가지고 태어나고(nature. Nativist), 이것이 성장하면서 가꾸어지거나 추가되고(nurture. Empiricist), 교육과 환경에 의해 정화되고 이성적 사유로 다듬어지는 것(reasoning. Rationalist)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형성된 도덕적 감정이 발로되는 과정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습니다. 도덕 심리학자들은 도덕적 판단이 직관적이며, 이성적 판단은 사후적인 합리화에 불과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도덕적 판단이 직관이라는 통로를 거치더라도 그 통로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사회적 문화적 교육적 환경에 의해 수정되고 성장하며 성숙되어갈 것입니다. 그러나 성숙된 도덕적 감정을 가진 사람의 경우에도, 위에서 말한 다섯 가지 도덕적 기준에 의존하는 정도에는 분명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13. 어떤 사람은 다섯 가지 도덕적 기준 중에서 주로

(1) 돌보아주는가 혹은 해치는가(care/harm),

(2) 공정한가 혹은 속이는가(fairness/cheating)라는 두 기준에 의해 선악을 판단합니다.

 

이런 사람들의 경우 남을 해치지나 속이는 행동이 아니라면 어떤 행위도 도덕적으로 비난 받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정치적으로 소위 진보에에 속하는 사람들은 주로 이 두 가지를 정치적 도덕 기준으로 삼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컨대 국기를 손상하는 행위, 국가 원수를 모독하는 행위,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의 애완동물과 성적 행위를 하는 등의 경우를 가정해 봅시다. 이런 행동들이 비록 위에서 언급한 다섯 가지 기준 중 처음의 두 가지 기준으로 볼 때, 다른 사람을 직접적으로 해치거나 속이는 행위는 아니므로 도덕적으로 비난 받을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머지 세 가지 기준, 즉 충성하는가 혹은 배신하는가(loyalty/betrayal), 권위에 승복하는가 혹은 반항하는가(authority/subversion), 고상한가 (성스러운가) 혹은 천박한가(야비한가) (sanctity/degradation)라는 기준에서 보면, 국기를 손상하는 행위는 국가에 대한 배신이거나 반항적 행위이며, 국가 원수를 모독하는 행위도 배신이거나 국가 원수라는 권위에 대한 반항입니다. 남이 보지 않는 사적인 공간에서 자신의 애완동물과 어떻게 놀았든 이는 개인 사생활의 문제로 도덕적 판단의 대상이 아니라고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천박한 행위로 도덕적으로는 비난 받아야 한다고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같은 이유로, 어떤 사람들은 국기에 대한 경례를 거부하거나 국가를 부르기를 거부하거나 군복무를 거부하는 행위를 개인의 양심에 의한 선택으로 보고 도덕적으로 비난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누구를 해치거나 속인 것이 아니라는 주장입니다.

14. 소위 정치적으로 진보 측에 속하는 사람들 중에는 처음 두 가지 기준으로 도덕적 판단을 하는 경우를 흔히 봅니다. 보수 측에 속하는 사람들은 위 다섯 가지 기준 모두를 도덕적 판단의 기준으로 삼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럴 경우 그 차이가 되는 나머지 세 가지 기준이 특히 부각됩니다. 그래서 상대 측으로부터는 국가에 대한 맹목적 충성, 권위에 대한 무비판적 승복, 종교적 맹신 등의 보수 꼴 통으로 비난 받기도 합니다. 촛불 집회에 세월호 리본이 많이 보이고, 태극기 집회에 군복이 많이 보이는 것은 위 다섯 가지 기준에 대한 두 집회에서의 강조점이 돋보이는 사례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다섯 가지 기준 중 처음 두 가지가 주로 개인주의적 도덕 기준이라면, 나머지 세 가지는 그룹(집단)적인 도덕 기준으로 평가됩니다. 교육수준이 높은 산업화된 부유한 서구 민주국가(Western, Educated, Industrialized, Rich, and Democratic: WEIRD) 시민들 중에는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높아 처음 두 가지 도덕적 기준이 정치적 이념의 기초가 되는 경우를 봅니다. 그러나 세계전체 차원에서 보면 이런 소위 선진국 시민들의 도덕기준은 일반적이기보다는 '특수한' 경우(Weird)라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세계 인구의 다수를 점유하고 있는 인도인과 중국인의 경우를 보더라도 이들 나라의 시민들이 갖는 일반적인 정치도덕감정은 나머지 세 가지 기준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는 것이 Haidt의 주장이기도 합니다.

15. 전통 경제학에서 경제인간의 행복은, 개인의 물질적 소비수준과 이에 대한 만족 정도에 의해 결정된다는 전제 위에서 전개되는 경우가 일반적입니다. 그러나 심리학자들은 인간의 행복은 심리적, 정신적 상태와 같은 인간 내부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그 뿐만 아니라 인간의 행복은 또한 외부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외부로부터 오는 인간의 행복이란 자신과 다른 사람과는 올바른 관계, 자신과 자신의 하는 일과의 사이에 관계, 그리고 자신과 바깥 외부와의 관계에서 오는 행복을 말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자신이 속하거나 지지하는 정치적인 집단, 그리고 경쟁적인 다른 정치집단과의 관계는 우리의 행복에 지대한 영향을 줍니다.

앞에서는 사람들이 왜 정치적으로 이념적으로 대립되는지에 대해 도덕 심리학적 관점에서 살펴보았습니다. 정치적 도덕 감정은 흔히 이념으로 나타나는데, 이념이란 실상 사회질서가 어떠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달성할 수 있는지에 대한 신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정과 자유 중에서 무엇을 더 우선으로 생각할 것인지, 경제질서가 정부에 의해 주도될 것인지 시장에 의해 주도되어야 할 것인지, 개인의 이익과 집단의 이익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지, 자신이 속한 집단에 충성하고 지도적 권위에 승복해야 하는 것인지 등에 대한 도덕적 판단은 정치적 이념을 좌와 우로, 혹은 진보와 보수로 구분하게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정치적 견해를 달리하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자신이 받아들이는 도덕적 기준의 차이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도덕적 기준의 차이에 의해 집단이 나누어지는 또 하나의 영역은 종교입니다. 다행히 우리나라는 종교적인 문제가 정치적, 이념적인 문제처럼 대립적이지지 않은 것이 무척 다행한 일입니다. 그러나 다른 나라에서 보면 종교적인 대립이 매우 심각하여 정치적인 대립의 원인이 되고 내란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사실 종교에서는 정치에서보다 더 집단 도덕적 판단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종교에서는 신앙 못지 않게 집단적 소속감이 주요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정치에서 이념과 마찬가지로, 종교에서 신앙은 행동을 정당화하고 집단을 지지하는 도구가 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종교에서 집단간의 첨예한 대립이 없는 것은 무엇 때문인지 우리나라 정치가 얻어야 할 가까운 교훈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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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필자가 Jonathan Haidt의 책을 읽은 독후감으로 쓴 것이며,

다음의 책들을 참고하여 그 내용을 보완하였다.

(1)Dan Ariely, Predictably Irrational: The hidden forces that shape our decisions, Harper, 2009, 368p;

(2)John Cassidy, How Markets Fail: The logic of economic calamities, Farrar, Straus and Giroux, 2009, 390p:

(3)Richard Dawkins, The Selfish Gene, 이용철 역, 동아출판사, 1992, 295p; (4)Jonathan Haidt, The Righteous Mind: Why good people are divided by politics and religion, Vintage Books, 2013, 500p;

(5)John Rawls, A theory of Justice, Harvard U Press, 1971, 607p,

 

(6) Michael J. Sandel, Justice: What's the right thing to do? Farrar, Straus and Giroux, 2007,30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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