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8월9일 [權泰鳴칼럼] 豊臣秀吉의 朝鮮侵略司令部 - 名護屋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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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풍장시 작성일26-08-09 10:51 조회65회 댓글0건본문
2026년8월9일 [權泰鳴칼럼] 豊臣秀吉의 朝鮮侵略司令部 - 名護屋城

1592년4월13일(음력),朝鮮侵略을1년 남짓 앞둔1591年初‘도요토미秀吉’(豊臣秀吉)는九州사가현(佐賀県)서북단의‘히가시 마쓰우라’(東松津)半島끝자락 진제이(鎭西)마을에朝鮮侵略司令部건물을 건립했다. Nagoya城(名護屋城→名古屋城과 발음이 같지만,완전히 다른城임)이다.후쿠오카(福岡)市에서 서쪽으로100여km거리에 위치한名護屋城은400여년전戰國時代에 그 지역領主였던‘나고야’(名護屋)가문의城이 있었던 자리에 세워졌다.秀吉의 특명을 받고 공사감독을 맡은‘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는‘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와‘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등當時 九州의領主들을總動員하여5개월 만에城을 완공했다.名護屋城은韓半島쪽으로 펼쳐지는玄海灘바다가 저만치 내려다보이는 높은 언덕 위에 있었다.

(寺沢広高)
지금은 건물이 한 채도 남아있지 않은名護屋城은 당시日本에서 가장 큰秀吉의 오사까성(大阪城)다음으로 큰城이었다.총면적17만㎢규모의名護屋城은城의 중심 건물인本殿외에5개의城廓과 크고 작은11개의 부속 건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해발88.8m의山위에 세워진平山城이다. 5층건물에天守閣과 망루,서원,다실 등을 고루 갖춘名護屋城이 완공되자秀吉은朝鮮侵略戰爭을 서두르기 위해城을 중심으로 직경3km안에‘도꾸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비롯하여前田利家,加籐淸正,小西行長등160여명의領主들의 휘하 부대를動員하여鎭西,呼子,玄海등城에서 가까운 인근지역30여곳에 부대를 부채꼴 모양으로 배치했다.지금도當時 陣地의 흔적이 일부 남아있다.名護屋城 完工직후인1592년4월13일秀吉은朝鮮侵攻을 단행했다.侵略이 시작된후秀吉은1년2개월 동안 이城에 머물었다.日本歷史는壬辰倭亂을秀吉이 저지른最大의失策이라고 평하고 있다.이朝鮮侵略戰爭은1598년秀吉의死亡으로 막을 내렸으며 동원된領主들도 모두 각자의領地로 돌아갔다.그후九州가라쓰(唐津)藩의‘데라자와 히로다카’(寺沢広高)가 이城의領主가 됐으나 얼마안가城을 허물어버리고 자재를名護屋城남쪽에 있는 가라쓰(唐津)로 옮겨 새城을 세웠다.남은 건물 한 채 없이 황량한 분위기마져 감도는名護屋城터엔 돌담 일부와 돌계단 그리고 두개의碑石이 남아있을 뿐이다.城건물이 있었던 넓은 빈터에 올라서면 두 개의 둥근 돌을 포개놓은 짙은 갈색의碑石이 유난히 크게 보인다.윗돌에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다.『太閤が睨みし海の霧かな』(註:晲→우리가 쓰지 않는漢字,흘겨볼‘해’또는 기울려질‘예’)




(肥前名護屋城圖屛風)
佐賀県立名護屋城博物館(https://saga-museum.jp/nagoya/)은日本의朝鮮侵略을 반성하고 앞으로韓日兩國間의交流擴大와友好增進을 목적으로 옛성터에 세워진 것이라고 설명했다.博物館에는 약220점의 자료가 전시돼있다.家田씨의 특별배려로外部人에게 촬영이 금지된名護屋城과 주변을 그린 여섯폭짜리 대형 병풍인肥前名護屋城圖屛風(비전名護屋城도병풍)과秀吉의 목제좌상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다.秀吉의 목제좌상은 일본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희귀한 작품이라고 했다.肥前은 지금의九州의西北지역인‘나가사키’(長崎)와‘사가’(佐賀)県일대의 옛 이름이다.博物館에는日本의 유물 외에도壬辰倭亂때 사용했던朝鮮의 거북선모형을 비롯하여 불랑기포(佛狼機砲)와忠武公이순신(李舜臣, 1545~1598)將軍의 초상화,복제한忠武公의 도독인(都督印),그리고朝鮮時代의 옷장인 흑칠도봉용문장(黑漆塗鳳龍文欌),고려금판경(高麗金板經),문관부처상(文官夫妻像),朝鮮文武官의 상하의 예복인 문녹색운보문첩리(文綠色雲寶文帖裏)와 충무공전서(忠武公全書)등 우리나라의 공예품과 유물들이 전시장 면적의 반이상을 차지하고 있다.이밖에古代부터現代에 이르기까지韓日 兩國間에 있었던交流의歷史를 자세하게 해설하고 있다.博物館 正門옆에는日本사람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만면에 넉넉한 미소를 머금은 제주 돌하르방이 의젓한 자세로 박물관을 지키고 서 있었다. <끝>
2013년8월權泰鳴 作成, 2026년8월9일 서울商大58會 傳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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