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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의 성난 맹수-에밀 자토펙(Emil Zatop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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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영주 작성일 04-02-28 06:54 조회 12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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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벌 트레이닝’의 창시자…



체코의 수도 프라하는 고풍스런 중세 유럽의 정취를 고스란히 간직한 곳으로 유명하다. 이 유서 깊은 도시가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친 것은 아마도 ‘프라하의 봄’으로 상징되는 민주화 운동 때문일 것이다.



1968년 소련의 강압적인 공산 정권에 맞서 프라하 시민들이 들고 일어선 이 사건은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영화 ‘프라하의 봄’에 잘 녹아 있다. 육중한 소련군 탱크에 짓밟히면서도 자유를 부르짖은 신산스런 역사로 말이다. 그래서일까. 체코인들에게 프라하는 그냥 도시가 아니다. 자유를 향한 체코인들의 정신과 의지가 배어 있는 하나의 ‘성지’다.



역사적으로 고난이 많아 처연한 기품이 서려 있는 도시 프라하. 체코의 마라톤 영웅이자 전세계 ‘육상계의 큰별’인 에밀 자토펙(Emil Zatopek)은 이 도시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는 인물이다. 반소(反蘇) 민주화 운동 당시 그가 있었던 곳은 사회주의 독재자들이 마련해 준 안식처가 아니라 분노한 시민들로 가득한 바츨라프 광장이었기 때문.



그는 소련군 탱크에 저항하는 군중의 선두에 서 있었다. 말하자면 그는 자유 수호의 대열을 이끄는 주동자였다. 체코인들이 그를 ‘성인’처럼 추앙하는 것은 그가 뛰어난 육상 선수여서이기보다는 그의 이런 남다른 조국 사랑과 민족애 때문이다. 체코인들은 그가 마라톤에 열중한 것도 따지고 보면 러시아 제국주의에 대한 항거요, 투쟁의 일환이었다고 말한다.



혼자서 세계 기록을 무려 18회나 작성한 ‘인간 기관차’ 에밀 자토펙. 지금부터 그의 남다른 마라톤 인생 속으로 들어가 보자. 참고로 그는 ‘인터벌 트레이닝’의 창시자이나 결코 엘리트 코스를 밟지 않았다. 어느 날 운명처럼 스며들어온 마라톤을 그냥 받아들였을 뿐이다.



잠자던 재능을 깨우다



자토펙은 1922년 체코 중부 모리아 지방의 코프리브니스에서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열 명이 넘는 형제 중 7번째였다. 대추나무에 연 걸리 듯 식구는 많은데 먹을 게 부족해 늘 배가 고팠던 소년 자토펙이 육상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40년. 그의 나이 19세가 되던 해이다. 당시 그는 즐린이란 곳에서 구두공장 직공으로 일하고 있었다. 16세 때부터 줄곧 몸담아온 일터였다.



빛나는 청춘을 아무 희망도 없이 가죽과 시너 냄새에 절어 보내는 그에게 새로운 꿈을 심어준 이는 공장 사장이었다. ‘바타’라는 구두공장을 운영하고 있던 사장은 당시 지역에서 열리는 1500m 크로스 컨트리 대회를 후원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공장 직원 중 누군가 한 명은 대회에 출전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모두들 격무에 지쳐 있던 터라 사장의 바람을 채워줄 직공은 없었다. 업무가 끝나면 너 나 없이 휴식을 취하기에 급급한 생활이었다.



사장이 공장을 대표해 대회에 나갈 직원으로 자토펙을 지목한 것은 큰 이유가 없었다. 그가 직원들 중에는 가장 젊었고, 우연히 자신의 눈에 띄었기 때문. 육상과 담을 쌓고 지내온 자토펙으로서는 여간 난감한 일이 아니었다. 거절했다가 사장 눈 밖에 날 경우 생계가 걸린 직장을 잃을 수도 있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어떻게 할까, 한참동안 고민하다 생각해낸 것이 꾀병으로 위장해 출전을 포기하는 거였다. 보다 확실하게 하기 위해 그는 아는 의사에게 진단서까지 끊어 달라고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의사가 거절하는 바람에 도리 없이 출전하게 되었고, ‘이왕 나가는 김에 제대로 한번 뛰어보자’는 생각으로 있는 힘을 다해 달렸다.



그 결과 지역에서 날고 뛴다는 선수들을 제치고 준우승을 차지했다. 사장을 비롯한 대회 관계자들은 의외의 결과에 모두 깜짝 놀랐다. 물론 가장 놀란 사람은 지금껏 뛰어본 적이 없는 자토펙 자신이었다. 그것은 자신 안에 숨어 있는 또 다른 자신을 발견한 일대 사건이었다.



첫 대회 출전 경험으로 탄력을 받은 자토펙은 이후 크고 작은 국내 대회에 나가 잠자고 있던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깨웠다. 나가는 대회마다 우승을 휩쓸었다. 1944년 유럽 챔피온십에 나갈 국가대표를 선발하는 대회에서는 2,000m, 3,000m, 5,000m 부문에서 모조리 체코 기록을 경신하기도 했다. 그로부터 2년 뒤에 열린 유럽 챔피온십 5,000m 부문에서 그는 또 다시 기록 경신에 성공했다. 이 대회에서 그는 자신이 세운 체코 최고 기록보다 24.4초 빠른 14분 25.8초의 기록으로 5위를 했다.



그런 그가 세계 무대에 얼굴을 알린 건 1948년 런던올림픽 대회를 통해서였다. 육상 선수로서는 노장 축에 들어선 26세의 나이였음에도 그의 이력에는 국제대회 경험이 전무했다. 그럼에도 그는 이 대회 10,000m와 5,000m 부문에 출전했고, 각각 금메달과 은메달을 목에 거는 쾌거를 이뤘다. 무명이었기에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당시 대회에 참가했던 한 선수는 그날 일을 이렇게 회고했다.



“우리는 에밀 자토펙이 어느 나라 소속 선수인지도 몰랐어요. 처음 보는 선수였으니까요. 그래서 결승에 올라왔는데도 경쟁자로 생각하지 않았지요. 게다가 그는 결승 초반에만 해도 10위로 쳐져 있어서 우승과는 거리가 먼 선수로 보였습니다. 그런 자토펙이 중반 이후 갑자기 앞으로 튀어나와 우리는 모두 깜짝 놀랐어요. 그가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진 선수 같았으니까요.”



중반 이후 선두로 나선 자토펙은 2위를 무려 두 바퀴 차이로 따돌리고 우승, 대회 최대 이변으로 기록되었다. ‘신발을 신은 전갈’이라는 그 유명한 별명은 이때 얻은 것이다. 이 대회를 시작으로 그는 1956년 은퇴하기 전까지 10,000m 대회에서만 무려 38회 연속 우승을 차지했다. 덕분에 ‘인간 기관차’와 ‘통통 튀는 체코인’이라는 추가 별명도 얻었다. 38회 연속 우승 기록 중 11개 타이틀을 1949년 한 해에 따냈다는 점은 지금도 놀랍기만 하다.





첫 도전한 풀코스에서 우승



런던올림픽을 통해 세계 무대에 화려하게 데뷔한 자토펙은 그 해 국가대표 동료인 데이나 인그로바와 결혼했다. 천생연분이었던지 두 사람의 생일은 9월 19일로 같았다. 그래서 결혼식도 생일날 치렀다.



투창 선수였던 그의 아내 인그로바는 결혼 후에도 계속 현역 선수로 활동했다. 뿐만 아니라 남편의 적극적인 후원 덕분에 성적도 결혼 전보다 오히려 더 좋아졌다. 그녀는 1952년과 60년에 열린 올림픽에 연속 출전해 각각 금메달과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부창부수가 따로 없었다.



자토펙 역시 생애에 가장 드라마틱한 장면은 1952년 헬싱키올림픽에서 연출되었다. 당시 육군 대위로 복무하고 있던 그는 런던 대회 때와 마찬가지로 주종목인 10,000m와 5,000m 부문에 출전했고, 내친 김에 마라톤까지 뛰었다.



그 결과 10,000m와 5,000m는 물론 마라톤까지 석권하는 기염을 토했다. 올림픽 3관왕이 된 것이다. 10,000m의 경우 마의 29분대를 최초로 깨뜨리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그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인데 마라톤까지 우승했으니, 헬싱키 대회는 온통 그에 관한 이야기로 넘쳐났다.



중장거리 선수이긴 했지만 마라톤 풀코스를 뛴 건 처음이었다. 게다가 앞서 뛴 두 종목에서 전력 질주한 까닭에 마라톤은 완주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할 상황이었다. 그런데 우승까지 했으니 그야말로 기적이 아닐 수 없었다.



“마라톤이 끝난 후 일주일 동안 걷지도 못할 정도로 힘들었어요. 그만큼 많은 에너지를 쏟아부었죠. 그렇지만 내 평생 가장 보람있고 즐거운 피로였습니다.”



우승 후 밝혀진 사실에 의하면 그는 대회 두 달 전 임파선염을 앓았다. 그 후유증 탓에 의사의 권고대로라면 출전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그러니까 그는 의사의 처방을 무시하고 대회에 출전했고, 장거리는 물론 마라톤까지 우승하는 쾌거를 올린 것이다. 그의 이같은 성적은 올림픽 역사상 두 번 다시 찾아볼 수 없는 사례로 기록되었다.



헬싱키올림픽에서 5,000m 질주 상황을 <장거리 달리기의 역사>(1982년 발행)라는 책을 공동 집필한 레이몬드 크리세와 빌 스콰이어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마지막 구간이다. 슈케이드, 카타웨이, 미몬, 그리고 심하게 고통받고 있는 자토펙 선수가 함께 뛴다. 이들 중 한 사람은 우승할 것이며, 나머지는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맛보게 될 것이다. 출발 신호가 울리자 자동적으로 튀어나간 자토펙은 깊게 패인 주름 탓에 눈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는 자신에게 부딪쳐 오는 사람들을 밀어낼 기운조차 없어 보인다. 전략적인 발차기 동작은 아무런 성과도 없이 기운만 빼는 것처럼 보인다.



100m 구간이다. 카타웨이가 그를 앞지른다. 슈케이드도 바짝 추격한다. 결승점 200m를 앞두고 카타웨이, 슈케이드, 미몬이 거의 나란히 달리고 있고, 자토펙은 이들보다 약 2m 정도 뒤쳐져 뛰고 있다. 자토펙은 경쟁 선수들과 속도전에서 한 수 아래인 듯이 보이며, 철마 같은 힘은 모두 소진된 듯 보인다. 슈케이드가 선두이며, 그 뒤를 카타웨이가 바짝 추격하고 있다.



마침내 결승점 구간이다. 관중들이 갑자기 열광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자토펙! 자토펙!’을 연호하며 일제히 함성을 지른다. 체코의 기관차는 내면 깊숙한 곳으로부터 마지막 남은 용기와 힘을 끌어모은다. 2년 후 세계 기록을 경신하게 될 카타웨이는 결승점을 향해 방향을 바꾸고 전속력으로 달린다. 바로 그때 자토펙이 블레이크의 시(詩)에 등장하는 성난 호랑이처럼 포효하며 달린다. 자토펙의 열기에 자극받은 슈케이드와 미몬도 순식간에 카타웨이를 앞지른다.



그러나 대세는 이미 기울었다. 자토펙은 경쟁 선수들을 모두 젖히고 다른 선수들보다 한 걸음 앞서 달린다. 순식간에 세 선수 모두에게 추월당한 카타웨이는 턴 폴을 스치고 트랙에 부딪친다. 자토펙은 두 눈을 감고 입을 벌린 채 고통으로 얼굴을 찡그리고 있고, 미몬은 자토펙을 저지해 보려는 듯이 양팔을 공중에 허우적거리고 있으며, 3위로 들어온 슈케이드는 안경 너머로 성난 눈빛을 하고 있다.



‘자-토-펙! 자-토-펙! 자-토-펙!’ 프라하의 맹수는 14분 6.6초로 결승 테이프를 끊는다. 뒤이어 미몬 선수가 14분 7.4초로 2위, 슈케이드는 14분 8.6초로 3위다. 이로써 자토펙은 슈케이드가 세운 올림픽 신기록을 무려 9초나 앞당기는 쾌거를 이룩한다.’



“달리면서 웃을 수 있는 재주가 없다‘



‘열악한 환경에서 훈련하면 실전이 훨씬 쉬워진다.’



그가 남긴 여러 어록 중 트레이너들이 가장 많이 인용하는 말이다. 자토펙의 끝없는 기록 경신의 비밀은 혹독한 훈련법에 있다. 헬싱키올림픽에 출전하기 전, 그러니까 군복무 시절 그는 홀로 다양한 방법의 훈련을 시도했다. 완전 군장에 손전등을 들고 캄캄한 연병장을 몇 바퀴씩 도는가 하면, 욕조 안에서 제자리 뛰기를 수백 번씩 하기도 했다.



또 다리에 4.4파운드짜리 추를 달고 가드 마스크를 한 채 질주하기도 했다. 심폐기능 향상을 위해 너무 오래 숨을 멈추고 달리다 기절한 후 심폐 소생술을 받고서야 깨어난 적도 있다. 당시만 해도 자토펙의 이런 기이한 행동들은 광기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표정으로 달리는 자토펙을 보고 누군가 “왜 그렇게 힘들게 달리느냐?”고 물었다. 그는 “내게는 달리면서 웃을 수 있는 재주가 없다”고 답했다. 우문현답이었다.



자토펙은 그렇듯 혹독한 훈련으로 자신의 육체와 정신을 담금질했다. 그러나 그가 오늘날까지도 세계 러너들로부터 존경받고 있는 이유는 다른 데 있다. 그가 체코인들뿐만 아니라 세계 러너들 사이에 전설적인 영웅이 될 수 있었던 건 자신이 직접 고안해낸 ‘인터벌 트레이닝’ 때문.



놀라우리만치 과학적이면서 효과가 큰 이 훈련법은 10,000m를 그냥 뛰는 것이 아니라 200m나 400m씩 구간을 나눠 각 구간을 전력 질주한 후 구간 사이마다 휴식을 취하는 방법이다. 이 방식대로 훈련하면 힘은 늘리고, 근육의 피로는 줄일 수 있다. 때문에 지금까지도 가장 널리 애용되고 있는 달리기 훈련법이다. 자토펙은 이 훈련법을 고안함으로써 모든 선수들에게 ‘육체는 혹독한 훈련에 적응하면서 더욱 강해진다’는 교훈을 남겼다.



자토펙은 헬싱키올림픽 후 1955년 15마일과 25,000m 두 종목에서 세계 신기록을 두 개 더 수립했다. 그리고 이듬해 출전한 멜보른올림픽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대회 성적은 비록 6위였지만 그로서는 우승보다 값진 쾌거였다. 대회를 불과 6주 앞두고 탈장 수술을 받았고, 회복이 온전하게 되지 않은 상태로 출전해서 얻은 결과였기 때문.



은퇴 후 그는 체코 육상팀 코치로 활동하다 1968년 ‘프라하의 봄’을 기해 해임되었다. 민주화 운동을 선도한 것에 대한 공산 정권의 처단이었다. 사회주의 영웅을 거부한 그는 이후 20여년의 세월을 유배 생활을 하듯 보냈다. 이때의 기억들을 그는 훗날 한 영국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탄광촌에서 석탄을 캐며 보낸 쓸쓸한 나날’로 술회하기도 했다.



그의 유배 생활은 1972년 뮌헨올림픽에 초청받을 때까지 계속됐다. 그가 자유의 몸이 되고 잃었던 권한을 되찾은 것은 공산 정권이 물러난 1990년이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한 시대를 풍미한 이 영웅의 바퀴는 이미 녹슬었고, 온갖 병마가 몸 곳곳에 집을 지은 상태였다. 이제 그는 병마와 싸워야 했다.



급기야 그 해 10월 그는 병원에 입원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바이러스에 감염돼 폐렴과 심장박동 이상이 겹치면서 건강이 급격하게 악화된 것이다. 투병 생활은 마라톤 코스만큼이나 길고 험난했다. 그의 골인 지점은 꿈에 그리던 2,000년 시드니올림픽이었다.



그러나 그는 꿈을 이루지 못했다. 뇌경색으로 올림픽이 열리는 내내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기 때문. 결국 그는 2000년 11월 22일 프라하의 국군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 78세였다.



장례식은 그 해 12월 6일, 체코 국가와 자토펙의 고향 민요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국장으로 치러졌다. 그의 장례 행렬이 지나간 프라하 거리에는 수만 명의 추모인들이 물결을 이뤘다. 시민들은 “그의 육신은 떠났지만 영혼은 우리 가슴에 남았다”는 말로 영웅을 잃은 슬픔을 달랬다.



이 날 장례식에 참석한 라미네 디아크 국제육상연맹(IAAF) 회장은 “우리가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은 그가 올림픽에서 4개의 금메달을 딴 영웅이어서가 아니다. 그보다는 너무도 평범한 한 인간으로서 개인의 자유와 존엄성을 위해 온몸을 던진 투사였기 때문이다”라며 눈물을 흘렸다.



디아크의 말처럼 체코인들에게 자토펙은 단순한 올림픽 영웅이 아니다. 그는 억압과 속박의 사슬을 끊기 위해 영혼을 불사른 자유의 상징이다.



말말말…자토펙의 어록



●새는 날고, 물고기는 헤엄치고, 사람은 달린다.



●승리는 위대하다. 우정은 더욱 위대하다.



●기적은 단 한 번의 훈련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수백 번, 수천 번 반복하는 훈련은 물리적 변화 이상의 것을 가능하게 한다. 눈비 오는 날이나 심한 피로가 느껴지는 날에도 나는 달린다. 자신의 의지가 문제되지 않을 때 기적은 일어난다.



●과거는 이미 지난 일이다. 나의 관심은 오로지 앞으로 다가올 미래다.



●달리는 우리는 남다른 사람들이다. 우승을 원한다면 100m 단거리를 뛰어라. 그러나 인생을 경험하고 싶다면 마라톤을 하라.



●러너는 가슴 가득 꿈을 안고 뛰어야 한다. 호주머니 가득 돈을 채운 자는 진정한 러너가 아니다.



●계단이 없다면 2층으로 오를 수 없다. 달성하기 어려운 목표는 아니 세우니만 못하다. 합리적인 목표를 세워 꼭 달성하도록 하라. 더 높은 목표는 그 후 조금씩 올려도 조만간 이룰 수 있다.



●고통을 맛보지 않고 소년에서 남자로 성장할 수 없다.



●인간은 조금씩 죽음을 맛본다. 오늘 이 순간에도.









서철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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